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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DIA_ Engineer/양자역학

닐스 보어(1885 ~ 1962)와 양자 역학 _ 철학적인 과학자

by U2DIA 2022.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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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나무위키





닐스 보어는 원자 구조의 이해와 양자 역학의 성립에 기여한 덴마크의 물리학자입니다. 훗 날 이 업적으로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보어 - 조머펠트 양자화



1911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방문합니다.

당시 케임브리지에는 전자를 발견한 존 톰슨이 있었는데, 그의 실험실에서 공부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보어는 영어에 서툴렀고, 톰슨은 이론 물리학을 좋아하지 않아 결국 어니스트 리더퍼드가 있는 맨체스터 대학교로 옮기게 됩니다. 거기서 리더퍼드가 실마리를 밝혀낸 원자 구조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보어가 완성하게 됩니다.

이 이론은 원자가 정상 상태일때 전자는 빛을 내지 않는 가속 운동을 하며, 특정한 반지름의 공전주기에서만 존재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깥 원에서 안측 원으로 이동할때, 물리학적으로는 ' 이동 경로 ' 가 존재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전자는 바깥 원에서 안쪽 원으로 순간 이동을 하고 이때 에너지를 방출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흡수한다는 것입니다.

보어는 전자의 각 운동량에 플랑크 상수라 불리는 어떤 숫자 (정수) 를 곱한 값만 가질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 때문에 공전 주기는 ' 띄엄 띄엄 ' 존재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출처 : 나무위키


이에 뮌헨 대학교의 조머펠트는 각 운동량 대신 ' 작용 ' 이라는 물리량이 쟝자화 되는 조건을 일반화 시키면서

' 보어 - 조머펠트 양자화 ; 라고 불리는 이론을 내세웁니다.



이 이론은 기성 세대 물리학자들에게 반감을 가져왔습니다. 기존 물리학 이론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이론이었던 것입니다.


1916년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이론에 관심을 보입니다. 2차원 적인 원자 모형을 1차원으로 치환하여 계산하는 조건을 좀 더 명확히 하는 논문을 냅니다. 이 논문의 마지막에 자신의 방법을 가지고도 1차원으로 분리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는 보어-조머펠트 방식으로는 양자화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지적한대로 원자 모형의 차원이 커지면 이론이 맞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보어는 1924년 원자가 진동하는 진자들의 모임이라는 이론을 내놓습니다. 이 새로운 이론은 에너지 보존 법칙 조차 위배한 이론이라 아인슈타인은 구역질 나는 이론이라고도 표현 했습니다.


1927년 보어는 상보성과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처음으로 밝힙니다. 이 내용은 훗날 코펜하겐 해석의 뼈대가 됩니다.

하이젠 베르크와 불확정성 원리


하이젠베르크는 24살에 교수자리를 제안 받을 정도로 영재였습니다.하지만 그 교수 자리를 마다하고 보어에게 달려갑니다. 거기서 양자 역학의 표준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하이젠 베르크 (1901~1976) 출처: 나무위키



전자는 워낙 작아 빛이 닿으면 순간적으로 위치와 에너지가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본다는 의미는 빛이 물체에 부딪혀 망망막에 맺히는 것을 뇌가 인식함으로 일어나는데, 전자의 물리량과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면 필연적으로 빛이 닿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빛이 닿아야 하는데, 그 순간 전자의 위치는 달라지니 정확한 값을 모른다는게 바로 불확정성 원리입니다.


하이젠베르크의 이 이론은 보어는 반응이 별로였습니다. 보어는 상보성의 원리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다소 철학적인 관점입니다.

앞선 포스팅에서 원자는 입자와 파동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 되는 실험은 절대 할 수가 없죠. 입자에 대한 실험을 하게 되면 입자가 보이고, 파동을 위한 실험을 하면 파동이 보입니다.


여기서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상보성의 한 예에 불과하다며, " 네가 한 것은 내 이론의 일부에 불과해 " 라며 무시하는 격으로 철학적인 이야기만 내놓습니다. 이에 둘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시작됩니다.



원자 폭탄과 보어


보어는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직전과 직후 우라늄 - 235를 사용하여 원자 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가능성을 피력했지만 충분한 양의 우라늄-235를 추출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믿었습니다.

1941년 하이젠 베르크는 독일 핵 에너지 프로젝트의 수장이었는데, 보어를 방문하여 사적인 시간을 보냈고, 서로 다른 설명을 하며 많은 추측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1943년 9월 어머니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가 그들의 가족을 유대인으로 간주 했으며, 체포 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덴마크 저항군의 도움으로 스웨덴으로 달아납니다.

영국의 처웰 경은 보어에게 영국으로 와달라고 서신을 보내고 보어가 영국으로 오게되오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게 됩니다. 보어는 핵무기가 전세를 바꿀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1943년 12월 보어는 워싱턴 DC에 도착하여 맨하튼 계획의 책입자를 만나고 뉴저지에 있는 아인슈타인과 파울리를 방문함과 동시에 핵무기가 설계되고 있던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로 떠납니다.

추후 " 그들은 원자 폭탄을 만드는 데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고 밝힙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변조된 중성자 개시자에 대한 작업의 중요한 기여를 보어에게 돌렸답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양자 역학의 확률적 이론에 거센 반발을 하며 "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 고 했습니다.

이에 보어는 " 신에게 행동을 강요하지 말라" 고 반박했었죠.

아인슈타인과 보어, 출처 : 나무위키



다음 포스팅에는 솔베이 전쟁이라고 부르는 솔베이 회의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 이 글은 김상욱 교수님의 양자 공부 책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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